진짜 사랑은 인문학
이 글은 작품들을 통해서 인식하게 된, 사랑의 5단계의 진화 과정을 적어본 것이다.
사랑은 과연 슬픔일까? 기쁨일까? 아니면 혼 밥일까?
제1단계
‘사랑의 기쁨’이라는 노래가 있다.
사랑의 기쁨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눈물로 보낸 나의 사랑 실비아
그대 나를 버리고 가는가 야속하구나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시냇물이 흘러가듯이
변함없는 내 사랑 바쳤노라
영원토록 변치않을 내사랑 실비아
오늘은 꿈결같이 사라져 갔네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
이 노래는 약 2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지만 아직도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 이유는 제목에 ‘사랑’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노래의 제목만 보면 누구나 사랑만 하면 마냥 기뻐지고 행복해질 것만 같다.
그러나 호기심에 끌려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금방 실망하고 만다. 왜냐하면 사랑의 기쁨은 시작과 동시에 사라져버리고 그 뒤는 사랑의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가사뿐만 아니라 곡 전체가 슬픔으로 묻어나오고 있다.
이럴바엔 차라리 노래 제목을 ‘사랑의 기쁨’이라 하지 말고, 사랑의 슬픔이라 해야 옳지 않을까 싶다.
만약에 이 노래를 처음 들은 사람이 있다면 꼭 속았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지만 간단하게 속았다는 기분으로 끝낼 일은 아닌 듯싶다. 이것이 하나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는 예술품이라고 생각하면 말이다.
왜 이 노래가 어쩌다가 기쁨과 슬픔의 혼 밥이 된 것일까?
일반적인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뭔가 고상하고 아름답고 영원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상 경험을 해보면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사랑’이라는 제목과 내용 둘 중에 한쪽이 잘못된 것이다.
이러 함에도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주제로 된 작품들은 어떤 마력에 이끌리듯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사랑’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이 노래는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못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사랑은 슬픔이 아니라 제목처럼 기쁨이요, 아름다움이요 행복해져야 되기 때문이다.
그 뒤 100여년이 지날 무렵 이번에는 사랑의 슬픔이 지나쳐, 도를 넘어 사랑에 대해서 저주하는 글이 발표되었다. 김 명순 작가의 ‘저주’라는 제목의 시다.
저주
길바닥에 구르는 사랑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 나와
사람 사람의 귀를 흔들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처녀의 가슴에서 피를 뽑는 아귀야
눈먼 이의 손길에서 부서져
착한 여인들의 한을 지었다
‘사랑’이란 거짓말아.
내가 미덥지 않은 미덥지 않은 너를
어떤 날은 만나지라고 기도하고
어떤 날은 만나지지 말라고 염불한다
속이고 또 속이는 단순한 거짓말아.
주린 이의 입에서 굴러서
눈먼 이의 손길에 부서지는 것아
내 마음에서 사라져라
오오 ‘사랑’이란 거짓말아! -김명순(1896~1951)
사랑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내다니 정말 끔직하다. 그래도 이 글은 작가가 경험한 것을 토대로 쓴 것이라 생각된다. 오죽이나 끔직한 경험을 했으면 이런 글을 썼을까 정말 안쓰럽다.
이런 시들은 일반적으로 생각해 오던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와는 아주 멀어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개인적인 쪽에 집착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만약에 작가가 좋은 상대를 만나 사랑을 누릴 수 있었다면 이런 글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 글들에는 언젠가는 누군가가 ‘사랑’의 진의를 밝혀 주리라는 희망은 품고 있다고 본다. 그러면 누가 읽어도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의 참의미는 과연 어떤 것일까?
제2단계
그 뒤 ‘사랑’에 대한 글들이 계속 이어지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만한 글이 없다가, 다시 100 여년의 세월이 지날 때쯤 그럴듯한 글이 구미수필 제10호(2012년)에서 발표되었다. 제목은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였다.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가끔 뼛속까지 시릴 때가 있다. 관절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그렇다.
마음이 시리거나 아픈 건 손가락이나 발가락의 골절 혹은 정강이의 통증보다 백배 더 고통스럽다. 차라리 어디가 멍이 들거나 뚝 부러졌으면 싶다.
언제부턴가 나는 기분이 처지거나 힘이 들면 행복했던 시절을 추억한다. 다섯 살 때의 모습이나 일곱 살 때의 기억도 있다. 오래되어 화면이 툭툭 끊어지거나 내용이 선명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앞뒤 연결이 잘 되어 있다.
겨울바람은 차디찼다. 벙어리장갑을 껴도 손은 곱았다. 발가락 끝도 몹시 시렸다. 골목에서 친구들이랑 눈사람을 만들며 놀던 유년의 나는 시린 발을 동동거리다 더는 견디지 못하고 대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뒤꼍, 아궁이 앞에 앉아 계셨다.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청솔가지가 피워내는 연기는 메웠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아버지는 청솔가지 대신 장작 몇 개를 들고 오셨다. 마른 장작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제 몸을 태웠다.
아버지는 고구마 서너 개를 아궁이 속에 묻었다. 나는 고구마가 익기를 기다리며 부지깽이로 장난을 쳤다. 부지깽이 끝에 불이 붙었다. 그것은 내 얼굴처럼 빨갛게 불타올랐다. 놀란 내가 부지깽이를 아궁이 앞으로 던졌다. 아버지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불붙은 부지깽이 끝을 재속에 묻었다. 부지깽이는 더 짧아졌다.
아궁이 앞은 따뜻했다 추위는 금방 잊었다. 곱은 손도 시렸던 발끝도 따뜻해졌다.
아버지가 아궁이에서 고구마를 꺼내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는 달았다. 뛰어노느라 허기가졌던 나는 허겁지겁 고구마를 먹었다.
“체한다. 꼭꼭 십어 먹어야지.”
아버지는 물이 담긴 그릇을 내 앞에 대주었다.
기억은 단막극처럼 쏟아져 나왔다. 내 발톱을 깎아주던 아버지, 장에 간 아버지를 기다리며 동구 밖에서 놀던 일, 아버지 등에 업혀서 먹던 과자, 감꽃목거리를 만들어 내 목에 걸어주던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도 생각났다.
나는 그 추억들을 17년 동안 쌓았다. 양적으로 따지면 아주 짧지만 17년 동안의 추억이 살아가는 동안 나의 양식이 되어주고 있다. 그건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마음을 배부르게 해주는 에너지다. 그 양지의 추억 덕분에 나는 마음을 곯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살아가면서 외롭고 힘든 순간과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저장창고에 보관해두었던 추억을 꺼내 먹는다. 고요히 씹고 있으면 행복한 기분에 빠져들면서 뭐든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솟는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도,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도 받는다. 행동을 함부러 하거나 마음 내키는 대로 막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도 생겨난다.
집 앞 겨울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면 앙상해서 다시 꽃을 틔울 수 있을까 의심스럽다. 하지만 웬걸, 봄이 오면 의심한 게 무색할 만큼 나무는 기운차게 새순을 틔운다. 몸속을 순환하고 있는 수액과 영양분이 눈보라를 견디게 해 준 것이다.
그것처럼 사람의 마음에도 허기를 채워줄 영양소가 필요하다. 그것은 돈이나 명예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제 몸을 함부로 포기하지 않는다. 우울감이나 절망에 빠져 사이트에서 마지막을 함께 할 동반자를 찾거나 아무 연고 없는 펜션에서 연결고리 없는 사람들과 만나 생의 마침표를 찍는 일 따위를 계획하지도 않을 것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추억은 마음을 곯지 않게 해준다. 타인의 눈에는 하잘 것 없어 보이는 것이어도 상관 없다.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은 소박한 밥상이었다. 소박했지만 그 밥상엔 사랑이 있었다.
어른이 된 요즘도 나는 지치고 힘들 때면 가슴을 열고 그 사랑을 꺼내 먹는다. 마음이 고프지 않게 채워주는 에너지원, 나는 그걸 사랑이라 부른다.
이 글은 1단계의 사랑의 의미와는 딴판이다.
이 글에서는 끝까지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다가 마지막 줄에서 ‘사랑’이 나오고 그리고 끝맺었다. 이는 처음부터 ‘사랑’을 쓰고자한 것이 아니었는데, 써놓고 보니 혹 이런 경우를 ‘사랑’이라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고 생각하고 제목을 바꾼 것 같다. 그러면 원래의 제목은 무엇이었을까? ‘내 생애의 아름다운 추억’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 글의 특징은 앞의 1단계의 글에서는 사랑이 연인끼리의 관계였다면 여기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사랑은 아름다운 추억에서 비롯되었고, 그것은 아버지가 만들어주었고 딸이 간직하게 되어 결국 딸이 행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 딸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은 변함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럴 때 한 가지 짐작해볼 수 있는 것은 만약에 그 딸이 어른이 되어 자식들을 가졌을 때는 그 자식들에게도 그와 같은 추억들을 만들어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다. 이 말은 행복이 자식들에게도 이어져 간다는 말인 것이다. 이 경우는 옛사람들이 흔히 쓰든 ‘내리 사랑’이라는 문구와 통하지 않을까 싶다. ‘내리 사랑’에서 ‘내리’는 양쪽이 격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사자가 아버지와 딸이 되어 딸은 그것을 필요로 했고, 아버지는 그것을 채워준다는 뜻이다.
이 때 아버지는 딸에게 일일이 이래라 저래라 하고 의식적으로 교육자적인 입장에서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라 본다. 그저 딸이 사랑스러워서 우러나온 행동이었고, 그것이 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공명에 의해 새겨졌던 추억은 딸의 순수한 마음에서 새겨진 것이라 쉽게 잊힐 리가 없고 오래 간다는 것이다.
사랑이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원하다고 한다면 이 글이 여기에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되어진다. 한 가지 의문점은 아버지의 그 추억 만드는 기술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다. 누가 가르쳐준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서 혼자 터득한 것일까 이다.
제3단계 예수의 ‘사랑의 기쁨’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사랑’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최후의 만찬’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제13장 34절-
예수가 한 말이다. 예수는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이고 그가 죽기 전날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으니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가 사랑했다고 한 행위는 어떤 것이었고 왜 그것을 또 제자들에게도 권했던 것일까? 예수가 그날 저녁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준 행위는 12제자들의 발을 한 사람씩 씻겨주는 것이었다. 그 끝에 나온 말이니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랑하라’라고 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발을 씻겨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행 중에 한 가지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제자 중 수제자인 베드로의 차례가 되자
“제 발을 씻지 못 하리이다”
하고 베드로가 거부한 것이다. 하인도 아닌 스승이 자신의 발을 씻다니 너무 안쓰럽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바로 예수의 말이
“내가 발을 씻어주지 아니하면 내가 너와 무슨 상관이냐?”
였다.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고 끝이었다. 이 날, 발 씻김은 평소에는 없었던 일이고, 중요한 시점에서 벌린 일이니 교육적 가치를 의미한다고 본다. 그것을 암시한 것이 ‘상관’이다. 특별한 날 ‘마지막 만찬’에서 일어난 일이니 ‘발 씻김’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봐야 한다. 그 ‘상관’은 바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다. 2단계에서 아버지와 딸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니 ‘발 씻김’은 자연적으로 가르침이 되는 것이다. 그 효과는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주인 즉 스승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내가 너희들을 가르쳤으니 너희도 내가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주라’는 것이 된다. 여기서 마지막 관문 하나가 남는다. 그것은 무엇을 가르쳤나 이다. 그것은 예수가 33세의 젊음을 기꺼이 버릴 수도 있는 값진 것이고 그것은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요한복음 13장 제16절과 17절의 말이다.
<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 2개의 절은 가르침의 내력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종과 주인은 제자와 스승과 같은 관계이다. 보냄을 받은 자는 예수고 보낸 자는 조물주다.
2단계에서 추억을 만드는 기술은 아버지가 처음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아버지께서 준 것이었다. 만약에 그 대를 거슬러 계속 올라가면 그 끝은 어디일까? 조물주이다. 예수가 가르침을 받은 그 상대가 바로 조물주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에게 추억을 만들어준 이는 예수의 아버지‘ 조물주라는 것이다. 조물주는 직접 대면할 수가 없으니 조물주의 작품인 자연을 통해서 터득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는 자연 통찰자 이었던 것이다.
자연에서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어 몇 개를 예로 든다면 존엄, 진리, 자유, 선과 악, 양심, 행복, 사랑, 아름다움 등이다. 이들은 찾기도 어렵지만 해석하기도 어려운 것들이다. 지금 시대에서도 많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따로 해석할 수 없고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이들 전체가 ‘장조’라는 하나의 단어를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제대로 해석하면 선(善)이 되고 그에 탐욕이 작용하면 악(惡)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것들을 자연을 기반으로 꿈과 상상력으로 제대로 해석한 사람은 예수가 유일하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17절에서 16절의 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했는데 이 16절의 참뜻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바로 추억의 기술을 최초로 가르치기 시작한 이는 조물주라는 것이고, 조물주의 뜻을 잘 새기고 그에 따라 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양심에 따라 살라는 것이다. 양심은 조물주의 것이었다. 그것은 삶의 커다란 지혜, 진리다.
요한복음 전채 과정에서 의문이 되는 부분들은 요한복음의 서문에 집약되어 있으니 거기서 찾아보면 된다.
아래는 요한복음 제15장에서 예수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요약정리해서 한 말이다.
<9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절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15절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서로 사랑하라’가 아버지, 조물주의 계명이었던 것이 예수의 계명이 되었던 것이고 또 제자들에게 이어졌던 것이다. 이 계명의 궁극적인 목적은 11절에서 기쁨을 충만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의 ‘사랑의 기쁨’이다.
제4단계
2단계에서 사랑이라고 한 것은 Ⓐ아버지는 딸에게 뭔가 인생에서 지혜가 될 수 있는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어 주었고, Ⓑ딸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이를 구분하여 Ⓐ를 선행(善行)이라 하고 Ⓑ를 사랑이한다라 하였다.
합친 전체를 사랑이라 해도 맞는 말이지만 굳이 이를 구분한 것은 사랑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하여 제대로 사용하자는 취지다. 1단계에서와 같은 혼잡을 피하자는 뜻이다. 그러면 1단계에서 잘못된 부분은 어디일까?
‘사랑의 기쁨’이라는 제목이 잘못된 것이다. 이런 연인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적용시키에는 뭔가 변화가 너무 심하다고 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단지 내용을 고상하게 보이기 위해서 ‘사랑’이란 단어를 인용했던 것이다. 내용에 맞는 제목을 붙이자면 ‘서로 좋아함’이 맞을 것이다. 격이 비슷한 사람끼리 좋아하던 사이가 오래 못가 어느 순간 싫증이 나고 그래서 멀어졌던 것이다.
‘아버지의 추억’ 예수의 ‘서로 사랑하라’ ‘선행과 사랑’ 등에서는 이런 싫증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오랜 기쁨이 있고 거기에는 고귀하고 아름답고 영원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장에는 삶의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역할도 한다는 것이다.
‘선행’과 ‘사랑’, 양 쪽을 구분해서 보면 ‘선행’ 쪽이 비중이 크다. 이유는 여기서 삶의 지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고 더 큰 이유는 선행은 조물주의 것, 조물주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행하라’는 신학(神學)이 된 것이고, 그에 반해 사랑은 인간의 삶에 꼭 필요한 것 그래서 터득해야 되는 것 인문학이 된 것이다.
선행이 창조의 목적이었고 그것은 인류가 끝날 때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선행이 중요하기에 이를 강조하고자 처음의 사랑을 세분한 것이다.
제5단계 행복이란? 양심이란?
‘선행과 사랑’은 이 세상 많은 일들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일이 이루어지면서 보너스로 얻어지는 것이 흐뭇함, 행복이다.
‘선행과 사랑’을 행하는 것이 거창한 일 같지만 순수함만 지니고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양심대로만 살아도 된다는 것이다.
'선행'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타인에게 양심대로 살 수 있도록 일깨워 주면 되고, '사랑'은 상대 쪽이 그를 통해서 희미한 자신의 양심을 더 공고히 하면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아름다움이 되고 조금더 진하면 모두에 행복이 되는 것이다.
양심은 조물주의 배려에 의해 창조 때부터 모든 생물에 심겨져 있었던 것이다. 문명이 발전할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양심이다.
오늘날 특히 정치계에서 양심이 불량한 사람들이 많다. 선행과 사랑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많이 배운 사람이 양심이 불량일 때는 큰 사고를 친다.
'자유계시판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재판관 8명, 내란죄 고발 (0) | 2025.02.18 |
---|---|
박 한철 전헌법재판소장의 문제의 발언'탄핵심판 3월13일 전 결론내야' (0) | 2021.11.19 |
봄은 또 오고 (0) | 2021.04.02 |
공 병우tv는 대통령탄핵재판 문제는 다루지 말고 전문분야인 선거부정에 대해서만 충실해줬으면 합니다. (0) | 2020.07.10 |
조물주의 사랑 (0) | 2020.07.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