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선행(善行)과 사랑
가끔 중요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리고 그 문제가 인간이 풀기 어려운 문제가 되어 부닥쳤을 때, 그런 때에 조물주는 어떻게 처리하라고 했을까 하고 생각하는 습성이 생겼다.
인간은 몰라도 조물주는 알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조물주가 세상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자연에 혹시 해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런 것이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까,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면 조물주를 한 번 만나봤으면 좋겠는데 그렇게는 할 수 없고, 고심 끝에 생각해낸 것이 혹시 이런 문제의 열쇠가 자연에 있지나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한 가지 비유하자면 이런 것이다. 어느 집에 주인이 거동이 불편해지자 하인을 한 사람 들이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집에 남루한 거지 한 사람이 문전에서 밥한 끼를 구걸하였다. 하인이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일단 주인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인 앞에 가서 사정을 고하니 뜻밖에도 주인은 식모에게 시켜서 밥 한상 차려 대접해 보내라고 하신다.
이런 식으로 쉬운 일부터 시작하여 여러 가지 일을 겪다보니, 하인은 이제 일일이 물어보지 않아도 주인의 뜻을 알고 혼자 처리할 수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조물주가 이런 질문들을 예상하고 미리 자연에 준비해 두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자연을 관찰하면서 창조의 조밀함에 감탄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생겼다. 조물주는 은연중에 내가 모르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자연에 있는 만물들은 어느 것 하나라도 그냥 심심해서 만든 것이 없고, 조물주가 자신을 본떠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열어나가면 마지막에는 조물주에 대해서도 다 알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자주 대하다 보니 이제는 조물주가,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아주 먼 곳에 있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우리 가까이에 있고, 우리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스승이 되어 우리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가 만든 작품 속에 살고 있고, 그 작품의 주인공인 우리 인간에게 관심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학(神學)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조물주와 우리 인류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이는 또한 가까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내용을 알면 알수록 조물주는 인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조물주는 인간들이 마음껏 뛰놀 수 있도록 자연이라는 거대한 무대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통해서 뭔가를 특히 지혜를 알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인간의 삶에 생기를 주기 때문이다. 마음껏 뛰놀려면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조물주는 인간에게 선행을 통해서 뭔가 인간의 삶이 가치 있고 유익하도록 해주고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려 했던 것이다. 또한 자신도 행복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선행과 사랑’은 이렇게 양쪽에서 행복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행복 중에서는 조물주가 선행을 하고 인간이 같이 사랑할 때가 조물주와 인간, 양쪽 모두에 가장 큰 행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가끔 부부라는 것이 정신적인 면에서 어떤 사이로 만나는 것이 좋은 관계를 유지해 가는데 유리할까 하고 생각해 본다. 예를 들어보면
1, 서로 좋아하는 사람끼리(친구처럼)
2, 사랑하는 사람끼리(연인으로서)
3, 선행과 사랑이 가능한 사람끼리(수준 차이가 있는)
1, 2의 내용은 급이 비슷하여 둘을 하나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에 비해 3은 완벽한 둘이 된다. 즉 전자는 정체된 물이고, 후자는 흐르는 물이라는 것이다.
1, 2의 경우는 자칫 세월이 갈수록 지루하고 열이 식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이 똑 같은 것이 반복되면 싫증이 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년 동안 똑 같은 일을 매일 반복했다고 하면 그것은 하루살이 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서 3에는 지혜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새것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늘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1, 2는 3에 비해서 수준차이도 별로 없고, 내용면에서도 다양하지 않아 선행과 사랑이 일어나기 어려우니, 행복의 측면에서 살펴볼 때 상당히 불리하다는 것이다.
행복이 선행과 사랑에서 비롯된다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것이 1, 2에는 단점이 되고 3에는 장점이 되는 것이다. 3에서 이것이 장점이 되려면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지혜를 가진 쪽이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도자가 국민들을 지혜로 이끌고, 가끔 새로운 것으로 국민의 삶에 생기를 불어넣어 줘야한다는 것이다. 즉 선행의 마음으로 큰 조직의 분위기를 잘 이끌라는 것이다.
인간이 3의 경우를 통해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은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염려하여 조물주가 창조 막판에 급조한 것이 ‘양심’이다. 조물주가 큰 맘 먹고 자신을 내어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줬던 것이다.
이 양심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지혜를 갖지 않아도, 양심만 잘 활용하여도 행복은 맛볼 수 있다. 원시적 인간들의 행복을 위해서 조물주가 특별히 배려해 놓으신 것이었다. 특별히 지혜를 터득하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양심이 발전하여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그것이 이론적인지혜가 되는 것이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양심과 지혜는 같은 성질이다.
양심은 조물주가 창조 마지막 때 미처 준비가 안 된 인간의 낮은 수준에 맞게, 행복을 위해서 인간들에 심어 주셨던 맞춤형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로 시작된 조물주의 선행이었고, 그리고 그 때의 사랑은 인간 혼자는 깨닫기 어려워 조물주의 도움으로 같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물주의 강제, 조물주 혼자서 선행과 사랑을 다 이루었기에 그것을 뭉뚱그려 ‘조물주의 사랑’이라고 하고 있다. 명칭에 인간의 사랑이 빠진 것이다.
인간은 그 당시는 못 느꼈어도, 양심으로 인해 두고두고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선행과 사랑’은 현대식이고, 양심은 옛날식이다. 그렇지만 양심은 현제에도 통하고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통할 것이다. 왜냐하면 조물주가 뭇 생물들에 특별히 베푼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양심이라는 것이 세상 초기에 미개한 인간들을 위해서 조물주가 특별히 마련한 것이라면, 조물주가 표현해 내었던 양심의 본체는 무엇이었을까? 양심(良心)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존엄’이었다. 존엄은 조물주 자신이고, 이것을 본(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던 것이다. 창조는 조물주가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니 내가 조물주의 뜻을 따르려면 존엄을 가지고 양심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조물주가 원하는 삶이 되는 것이다. 존엄은 사람의 몸통이고 양심은 옳게 사는 방법이다.
조물주의 삶을 산다는 것은 처음부터 또 혼자서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사람에 따라 각자의 능력과 처지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같이 어울려 낮은 단계에서부터 차근차근 키워 가면 그 과정에서 부터 행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선행과 사랑에 관하여 모범적인 3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첫 번째는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의 경우다.
그는 독일태생의 의사요, 신학자요, 음악가로서 보통 사람들이 갖기 힘든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키워준 조국을 버리고, 지인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아프리카 오지로 간 것은 무엇 때문일까? 고생을 사서하고 싶어서였을까?
그의 생각은 이제는 능력을 갖추었으니 그것을 펼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인생의 3분의 2는 준비단계가 되고, 나머지는 그것을 펼치는 때라고 보는 것이다.
그는 이왕이면 큰 행복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택한 곳이 자신의 능력에 비해 격의 차이가 큰 오지를 택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양심이 살아있는 곳을 원했기 때문이다. 양심은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된다. 그 때까지 아프리카 오지는 때가 묻지 않은 원시시대의 자연 그대로의 상태로 살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즉 수준 차이가 크고, 양심이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의 2가지 조건이었던 것이다. 때가 묻은 곳, 양심은 죽고 공산주의 사상이나 기독교 교리가 번성한 나라에서는 행복이 펼쳐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행복이 펼쳐지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되기 때문이다. 한 번 훼손된 것은 복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이나 일부 선진국들이 신대륙 또는 미개국을 점령하여 제일 먼저 펼치는 정책이 기독교를 주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양심을 죽여 정신적 노예로 만들었던 것이다. 소련이나 중공은 사상을 주입시켜 속국으로 만들었다.
선행과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런 나라들을 ‘자유’가 없는 악(惡)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오지로 가서 시작한 것이 자신이 터득한 신학(神學)에 따른 인간의 존엄성을 살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의술을 펼쳐주었고 노래도 같이 불렀던 것이다.
그들에게 먼저 자신이 베풀고 그래서 그들이 행복해지면 그것들이 전부 자신의 행복이 되었던 것이다. 인간이 나만을 생각할 때는 절대로 행복이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박 정희대통령의 경우다.
박 정희는 보통 사람들이 갖지 못한 큰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후진국인 우리나라를 단숨에 선진국으로 키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가졌던 지혜와 후진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의 수준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심했던 것이다. 그 결심은 국민들이 빈곤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존엄을 살려주는 것이었다. 양심대로 살기엔 빈곤이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 걸림돌을 제거하는 것이 헌법 제10조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위해 앞서가는 그의 지혜는 보통 사람들은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조국근대화는 그가 외롭게 추진해서 이루어낸 것이다.
경제의 경자도 몰랐던 국민들에게 ‘하면 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면서, 같이 어울려 함께 땀을 흘리며 노력했던 그 시절이, 국민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도 국민 못잖게 행복해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세 번째는 예수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지구상에서 그리고 인류사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린 사람은 바로 예수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가 진한 선행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의 상대가 되어 예수를 사랑한 사람이 베다니의 마리아였다.
그의 생애는 비록 짧았지만 순간순간이 온전히 행복덩어리였다.
왜냐하면 그가 인류사 처음으로 조물주와 마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물주의 사랑’이라는 강제가 아닌 ‘선행과 사랑’이 처음 정식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조물주의 아들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예수는 조물주의 뜻을 밝혀 조물주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사람이다.
그가 이룬 가장 큰 업적은 이 세상을 완벽하게 선(善)과 악(惡)으로 구분 지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이 진리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으로서 진리를 밝힌 유일한 사람이 예수인 것이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서로 사랑하라’ 라고 했다. 의미는 제자 중에 지혜를 먼저 깨친 자(먼저 깨달은 제자)가 미처 깨닫지 못한 제자를 가르쳐 주라는 것이었다(one another). 제대로 얘기하면 먼저 깨달았으면 선행을 하라는 것이다.
‘선행과 사랑’이라는 말이 그 전에는 없었다. 내용은 그랬어도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사랑’ 하나로 통했다. 그러든 것이 조물주가 등장하면서 조물주는 인간에 비해 격(格)이 너무 차이가 크다고 생각되어 조물주를 따로 구분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양쪽을 선행(善行)과 사랑으로 구분한 것이다. 조물주가 스승이 되어 가르쳐주는 것은 선행(善行)이고, 인간이 그것을 터득했다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끼리의 경우라도 내용이 조금이라도 지혜에 가깝다고 생각되어질 때는 그것도 선행과 사랑에 포함시키게 되었다.
예수는 인간이라면 알아야할 중요한 지혜를 전부 밝혔던 것이다. 그것은 조물주의 선행을 양심에 덧붙여 이론적으로 사랑했던 결과다.
더 이상 밝힐 것도 없고 또 조물주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다 누렸으니 이제는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가 그의 나이 겨우 33세 때였던 것이다. 예수는 욕심이 없었던 진정한 성인(聖人)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내가 예수와 모나리자를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 조금 설명해야 될 것 같다.
어느 날 예날 사람들, 특히 현자들은 ‘자연’을 어떻게 보았고 생각하며 살았던 것일까. 나는 궁금하여 여기저기로 알아보려고 많이 노력하였다.
그러든 어느 날, 하나님(조물주)에게 한 아들이 지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다. 그를 꼭 한 번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수소문 하는 중에 그는 이미 2000여 년 전의 사람이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의 언행이 적혀있는 책이 있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는데 그 책이 ‘성경’이라는 책이었다.
성경을 한 권 구해서 읽어봤지만 자연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었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내용들이었다.
그 뒤 성경은 잊어버리고 지나다가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어떤 사람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이 ‘예수’를 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의 말이 500여 년 전에 자연의 이치를 잘 알고 있던 유명한 화가가, 성경 내용의 한 부분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성경을 세밀히 읽고 해석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그 그림이 ‘모나리자’라는 그림이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때 성경을 읽고 해석한 내용에는 ‘예수’가 주인공이었고 그 결과물이 ‘모나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를 알려면 그 ‘모나리자’라는 그림만 잘 이해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 때부터 나는 시간만나면 ‘모나리자’ 에 관심을 가지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결국 그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성경내용(예수)에 흠뻑 빠지게 되었는데, 거기에는 자신이 그렇게도 갈망하던 자연의 지혜를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말년에 얻은 행운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해 예수를 표현하고 또 그의 제자, 마리아를 그리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그 두개의 그림들이 '최후의 만찬'과 모나리자였다. 그 그림들은 따로따로가 아니고 하나였던 것이다.
그는 특히 ‘모나리자’를 그리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실물이 없으니 오로지 상상으로만 그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어디를 가던지 그림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수시로 생각이 나면 수정도 하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였다. 숨을 거둘 때까지 모나리자를 아꼈던 것이다.
그렇도록 집중해서 그린 그림이, 최고의 화가의 격에 맞게 그려진 최고의 그림, ‘모나리자’가 되었던 것이다. 다빈치가 마리아에 집착한 것은 예수의 선행을 사랑한 유일한 예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모나리자’가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보는 것은 그녀가 품고 있는 지혜 이상의 다른 지혜는 나올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선행과 사랑’의 관점에서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모나리자’의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모른다. 그런데도 현제까지 최고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통하고 있는 것은, 인물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녀의 얼굴에 번지고 있는 미소 하나 때문이다.
열릴 듯 말 듯,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한, 살아 움직이는 듯 한 엷은 미소가 나를 향하고 있으니 모두의 혼을 빼앗고 있는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그림, 이런 그림은 다빈치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모나리자’가 탄생하게 된 데는 성경이 중재로 한 몫 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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