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물주의 사랑(하)
사랑은
사랑은 삶의 지혜를 터득하는 것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능력이지요.
사랑을 하면 내 마음이 아름다워지지요.
아름다워진 내 마음은 모두를 아름답게 보이게 해요.
아름다워진 우리 모두는 좋은 친구가 되지요.
나는 알았다
좋은 친구가 되는 데는 선행과 사랑이 있다는 것을 ```````
선행은 이끌어주고 사랑은 따라가 주고
그래서 결국은 같아지는 것, 이것이 친구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주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풍겨져 나오는
그런 친구가 된 것이다.
“선생님은 자연에 있는 어느 누구와도 상대가 되고, 친구가 될 수 있는 좋은 마음씨를 가지고 계세요. 저 진달래는 그 많은 중에 선택된 하나일 뿐이에요. 선생님은 참 좋으시겠어요.”
“무슨 얘긴가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돌아다닐 수 있고, 자연에 있는 동식물들, 누구와도 만나서 친구가 되어주고, 친구가 되어서는 그 가치도 알아주고 재밌는 대화도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자연은 선생님을 위해서 조물주가 만들어 주신 하나의 커다란 카페, 선생님은 거기서 보고 들은대로 마음껏 좋은 글도 쓸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어요.”
“좋게 보아주니 고맙기는 하다만```````, 내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은데, 아직은 능력이 부족한 것 같아요. 이번에 진달래님을 만난 것은 큰 수확인 것 같아요.”
“다음번엔 또 누구를 만나 무슨 얘기를 하실는지 참으로 궁금해져요. 누가 되던지 선생님이 많이 도와주세요. 이런 얘기 자꾸 하다가 저 열 받겠어요.”
“생을 일찍 마침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었나 보죠?”
”이 진달래가 다시 한 번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그 때는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친구도 많이 만들면서, 멋지게 한 번 살아보고 싶어요. 이제 이 얘기는 그만하고, 성경 얘기 계속하겠어요. 어떤 작가가 작품을 만들었다면 그 작가는 무엇 땜에 그런 작품을 만들었을까요? 한 번 말씀해 보세요?”
“작품을 만든 사람이 그것을 통해서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자신의 의중을 전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래서 자신도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닐까요?”
“그러니까 그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 뭐냐는 거예요?”
“그건 작품을 만든 작가에 따라서 다 다르겠지요?”
“맞아요. 만약에 작품이 이 넓은 자연이라면 그 작가는 누구겠어요?”
“그야 당연히 조물주겠죠.”
“그러면 이 자연을 감상하고 조물주의 의중을 파악해야할 상대는 누구겠어요?”
“그야 인간들이겠죠.”
“맞아요. 결국 자연은 인간들과 조물주의 관계 즉 연결고리가 되는 거예요. 인간들이 자신들을 위해서 보금자리를 마련해준 주인을 한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과연 인간들이 조물주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을 까요? 조물주는 무엇 땜에 이 자연을 만들었을까요? 창조는 왜 필요했을까요?”
“글쎄요. 한마디로 얘기하기엔 어렵지 않을까 생각되는 데요.”
“맞아요. 작가가 인간이 아닌 조물주이기에 인간으로서는 더더욱 어려울 거예요. 만약에 어려워서 파악할 수 없다면, 그러면 이 자연은 누구를 위해서 만든 것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조물주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네. 만약에 파악할 수 없게 된다면 조물주는 처음부터 이 자연을 만들 필요가 없었거나 또는 잘못 만든 것이 되어 창조는 뒤죽박죽이 되고, 자연은 있으나마나한 무용지물이 되었을 거예요.”
“그렇다 해도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어떻게 신(神)의 의중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데요?”
“그 의문을 풀어준 사람이 예수이고, 그 내용을 적은 책이 바로 성경이라는 것이고요. 그래서 성경을 최고의 책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성경이 조물주, 신(神)을 설명하는 책이라는 거예요?”
“맞아요. 그 말은 신(神)을 알려면 성경을 보라는 말과 같아요.”
“우와~ 성경을 다시 봐야겠어요. 예사로 봐서는 안 되겠어요. 언제 한번 차분히 읽어봐야겠어요.”
“맞아요. 중요한 책이에요. 특히 거기에 나오는 단어들, 존엄, 선(善)과 악(惡), 자유, 진리, 인간의 자유의지 등 이런 단어들은 신(神)의 의중을 나타내는 오리지널 단어들이고 동시에 인간들의 삶에도 적용되는 꼭 필요한 것이고, 중요한 단어들이기 때문에 찾아보면서 눈여겨봐야 해요. 이런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는 창조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들은 중요한 단어들이에요..”
“그것을 찾아낸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은 데요?”
“못 찾을 정도로 어려운 것도 아니에요. 정히 어려우면 자연에 있는 사실들을 찾아 참고하면 돼요. 결국 성경은 자연을 설명하는 책이라는 거예요. 조물주에서 자연, 성경으로 이어진 거예요. 인간들이 이런 단어들을 찾을 수 있도록 신(神)이 신경 써서 자연을 창조하셨던 거예요. 성경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던 거예요. 누구나 원하는 사람에게는 자연이 선행의 역할을 하도록 자연을 만드셨던 거예요. 조물주는 자연에는 선행을 하면서 동시에 직접 사랑을 베푸셔서 양쪽의 입장에서 두 가지 일을 한 번에 하셨던 거예요. 이렇게 선행과 사랑을 동시에 하는 것을 창조라 해요. 창조에서 신(神)이 자신과 같은 형상으로 인간을 만든 것은 신(神)과 인간의 간격을 좁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어요.”
“얘기를 듣고 보니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멀리만 느껴지든 신과 인간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지고, 조물주가 어찌 보면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 이웃집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 아름다움이고, 이를 선행과 사랑을 통해서 서로 나눠 가지고, 같이 행복을 누리라는 것이 그의 의중이에요. 그리고 이럴 때 악은 생활에 생기를 불어넣어주고 행복을 배가시키는 촉진제 역할을 해요. 악(惡)도 선(善)을 위해서 많은 공헌을 하고 있는 거예요. 아셨죠?”
“네. 성경이 진짜 읽을 가치가 있는 아주 중요한 책이네요.”
“조금은 믿기지 않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에요. 앞에서 성경의 구성을 50%, 25%, 25%로 나눴는데, 이를 간단하게 A, B, C 라고 칭하면 위의 내용들은 이 중에 B에 있고, 이 B가 성경의 주제(主題)에요. A와 C는 B의 상대로 부제가 되는 것이고요. 이런 훌륭한 내용을 가진 성경이 왜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별로인 책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일까요?”
“선전이 안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교회에서는 B를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 큰 이유에요. 성경을 독차지 하고 있었던 교회가, 평소에 A와 C만을 다루었고 그것이 일반인들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를 보여주어, 일반인들이 보기에 교인들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고, 더불어 성경에도 같이 적용되었던 거예요. 만약에 교인들이 평소에 B와 같은 내용의 언행을 일반인들에게 보여줬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거예요. 만약에 그런 교회가 있었다면 그 교회는 기독교교회가 아니라 ‘인문학교회’가 되었을 것이고, 성경도 일반인들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갔을 거예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기독교가 일반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하도록 막아왔다는 거예요.”
“교회가 일반인들에게서 좋은 인상을 받으려면 B의 내용을 다루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B의 내용이 교회에서는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왜 필요가 없었을까요?”
“조물주 신과 교회의 신이 달랐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다른데요?”
“조물주 신은 자연을 창조하신 신(神)이고, 교회의 신(神)은 인간들이 가공(架空)한 신이에요.”
“그러면 자연은 어떻게 돼요?”
“교회에는 자연 대신에 가공되어진 교리라는 것이 있어요.”
“자연과 교리사이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어요?”
“한마디로 자연은 이치에 맞고 교리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니 교회 성도님들은 성직자가 일러주는 대로 믿고 따를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가공된 교리가 존엄도 해치고 질서도 파괴해서 더 이상 교회에는 아름다움도 존재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이끌어가는 것이 악이에요. 15세기 경 유럽의 중세시대가 그런 시대였어요.”
“선(善)과 악(惡)이 그렇게 해서 결정되는 거군요. 평소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애매하게만 알아오던 선과 악의 경계선이 이제는 뚜렷해지는 것 같아요. 이제 보니 이치에 맞게 살기 위해선 이 선과 악의 문제를 아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국민들이 이것을 잘 알지 못하고서는 악이 판치는, 정신적 후진국을 면하기는 어렵다고 생각 됩니다. 이제 보니 기독교가 악이라면 기독교가 흥한 국가는 문제가 되겠어요. 좋은 공부 되었어요. 앞으로 글을 쓰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선생님 같으신 분에게 도시보다 이 숲이 어울리는 것은 이 숲에 있는 모두는 순수하게 조물주, 신(神)의 질서에 따르는 선(善)만이 있는 곳이라 마음이 맞기 때문이에요. 질서를 깨트리는 것은 인간들이고 인간들이 북적대는 도시에서는 선생님이 원하시는 것을 찾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 많은 교회에서는 어울리기 힘들 거예요. 이제 어제 제가 드렸던 질문에 대한 답을 주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말씀해 주세요.”
“우리 사이에 실재로 사랑이 존재했는지를 묻는 질문 말이지요?”
“네, 맞아요.”
“내가 희미하게만 알아오던 사랑을 이제야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됐어요. 어제오늘 누구와 진짜 사랑다운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에요. 진달래님은 선행(善行)을 했고요.”
진달래가 빙긋이 웃고 있다.
“그런데 오늘 사랑을 하면서 한 가지 의문이 생겼어요.”
“그게 뭔데요?”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을 까요?”
“아! 잠깐만요. 한 가지 확실히 해둘 게 있어요. 조물주의 사랑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리고, 질문에 답하겠어요. ‘조물주의 사랑’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해온 설명에 따르면 ‘조물주의 선행’이라고 해야 맞아요. 아름다움을 신이 피조물에 주신 것이니까 신은 당연히 선행을 한 것이 되고 그것을 받은 피조물은 사랑한 것이 돼야겠지요. 그러나 태초에는 피조물들에 사랑을 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조물주가 대신해서 사랑의 역할까지 했었던 거예요. 특히 능력이 없는 동식물들에도 그들에 맞는 아름다움을 심어 주셨어요. 그 뒤 한참 지난다음에, 그래도 지금 기준으로 하면 아주 오랜 옛날에 일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의 존재와 결과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그래서 이름붙인 것이 ‘양심’이라는 거였어요. 아름다움을 양심으로 표현했던 것이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요행이도 의미가 같았어요. 즉 양심대로 살면 그것이 아름답게 사는 것이 되었던 거예요. 조금 원시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제 질문에 대한 답을 할게요. 사랑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얘기한 대로라면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거였어요. 반면에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매력에 이끌려 가까이 하고 싶고 키스하고 싶은 것으로, 사랑의 전초전이라 볼 수 있어요.“
“맞아요. 그런 것 같았어요. 야~ 기분 좋다. 누군가가 어제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으니. 그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무슨 말씀이세요? 누가 누구를 좋아했다는 거예요?”
“어제 진달래님이 내 뺨에 키스했잖아요.”
“제가 언제 키스했다고 그러세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정말이에요.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
/이상하네, 내가 꿈을 꿨던 것일까? 지금은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사랑까지 한 때인데/
“사람이 누구를 아주 좋아하게 되면 그런 허상이 느껴질 때도 있어요.”
“에잇! 좋다 말았네,”
“만날수록 선생님의 그 수수함이 매력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앞으로는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요.”
“이상하네, 공부한 대로라면 좋아함이 틀림없는데````. 어쨌든 진달래님이 어찌하든 나는 끝까지 진달래님을 졸아할 거예요. 그렇게 맹세했으니까`````` ”
“언제 누구에게 맹세했다는 거예요? 저는 맹세한 적도 없어요.”
“그 옛날 날뫼 뒷동산에서 내가 상황판단을 잘못하여 진달래를 발로차면서 행패를 부린 적이 있어요. 그 때 어지럽게 떨어진 꽃잎을 보니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그래서 주운 꽃잎으로 땅바닥에 하트를 그리면서 진달래에게 맹세했어요. 이 세상 끝날 때까지 너를 좋아할 거라고 하면서```` ”
“그리셨군요. 그 때 맹세하는 말은 못 들었어도 그려진 하트는 하늘 위에서 저도 보았어요. 그림이 하늘에서 보이기 좋게 그려져 있더라고요. 그 당시 저는 꽃잎이 이리저리 부닥치고 아팠지만 참고 견딜 수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그 일로 인해서 선생님과 저의 연(緣)이 계속 이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가까이 지내올 수가 있었던 거예요. 저도 그 때 선생님을 본 첫날 좋은 인상을 받았어요. 그래서 산을 내려온 후 종일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다음 날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책을 선물했던 거예요. 저는 그 때 아무 한 일 없이 빈털터리로 세상을 등지는구나 생각하고 큰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그런 중에 천행으로 선생님을 뵈올 수 있었고 책 선물이라는 뜻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거예요. 이런 우리의 만남이 진짜 우연이었을 까요?”
“나는 그것이 우연이라고 보지 않아요. 진달래님이 일부러 찾아왔던 건데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겠어요?”
“피- 저는 선생님이 거기 앉아서 며칠을 목이 빠져라 저를 기다리고 계셨다고 생각되는 데요?”
“아니오. 진달래님이 찾아온 게 맞아요. 그것도 이 세상에서 마지막 남은 힘, 죽을힘을 다해서 밀양이라는 그 먼 거리에서 나에게 다가왔던 거예요. 그러니 내가 감격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아니에요. 선생님이 며칠을 쫄쫄 굶어가면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신 게 맞아요.”
”안되겠어요. 이러다가 잘못하면 싸움 나겠어요. 내가졌어요. 그런데 그 때 입었던 그 긴 분홍치마는 어떻게 된 거였어요?”
“어머님이 결혼식 때 입었던 거였어요. 너무 예뻐 보이기에 달라고 해서 가진 것인데, 내내 가지고 다니기만 했지 입어보진 않았는데, 그날 처음 입어봤더니 길이가 엄청 길어서 잠시 걷는데도 애를 먹었어요.”
“역시 내 추측이 맞았어요. 웨딩드레스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면 설마 나를````?”
“몰라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제 마음이 무엇에 끌려 산으로 간 건 사실이고 또 그날따라 그 분홍치마를 입고 싶었던 것도 사실이었어요. 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서 책을 선물했던 것이고, 그 책이 저의 전부였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 보면 책 선물은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고, 그 결실을 지금 맺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흐뭇하고 보람을 느끼고 있어요. 저는 일찍 책을 좋아했고 좋은 책 한 권 써보는 것이 꿈이었어요.”
“그 당시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삶의 방향이 그 때 정해졌고 어쩌면 진달래님의 꿈이 내게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에요.”
“맞아요. 지금 글을 쓰시고 계시는 선생님은 저의 꿈도 같이 이루어주시고 계신 거예요. 그 책 제목이 ‘어느 시골중학교 음악선생님’ 이었지요? 이런 때에 저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뭔가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은 거예요.”
말을 마친 진달래가 아련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또 한 번 저의 곁에 가까이 와보세요.”
내가 곁으로 가까이 가는데, 후닥닥 내 볼에 키스하였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그런 중에도 그 키스의 감촉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고 진달래가 진짜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려한다. 진달래가 아무리 아니라고 했어도 꿈은 없었던 것이고, 현실로 확실히 증명이 된 것이다.
“이제 제 마음 다 아셨지요?”
“정 말, 고 마 워요.”
내가 말을 더듬거리자
“지금 우시고 계신 거예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진달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얼굴이 밝아지면서
“선생님은 가끔씩 애들같이 보일 때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 대하기가 아주 편하고 좋은 것 같아요. 이제 올해이자 오늘 만남의 마지막을 장식하려해요.”
“벌써요?”
“벌써가 뭐에요? 내년이면 또 만날 텐데”
“그래도 좀 천천히 해요. 어제 오늘 나는 말로만 들어봤지 무슨 뜻인지도 몰랐던 사랑을, 직접 체험을 할 수 있었으니 정말 꿈같은 이틀이 지나갔네요. 유익한 시간도 되었고 재미도 있었어요.”
“그동안 선생님이 열심히 자연을 가까이 해오셨으니 이제는 본 것들을 정리할 때가 된 거예요. 정리를 잘해야 좋은 글이 될 수 있어요.”
“알았어요. 그렇게 해볼게요. 만약에 내가 쓴 글이 책이 된다면 저자를 공저로 하여 내 이름 밑에 백 정숙을 같이 적을 거예요.”
“아니에요. 제 이름은 적지 마세요.”
“왜요?”
“무조건 싫어요. 선생님과 저의 지금의 이 세계가 저는 참 좋아요. 오래오래 계속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안 통할 수도 있어요. 저는 선생님과 여기 숲속 친구들, 우리들의 이 세계를 꼭 지키고 싶어요.”
“우리들의 세계? 그래요. 나도 꿈같은 이 우리들의 세계를 꼭 지니고 살고 싶어요.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은 꼭 흔적을 남기고 싶어요.”
“그게 뭔데요?”
“그 옛날 내 고향 날뫼에 한 예쁜 천사가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사뿐히 내려 찾아왔다고, 그 천사 이름이 ‘분홍치마 진달래’였고 그 진달래가 내게 들려준 얘기에 이끌리어 쓴 글이 바로 이 책이라고, 머리말에 쓸 거예요.”
“선생님은 제가 싫다는 데도 왜 자꾸 쓰시려 해요? 미워요!”
밉다는 말에 깜짝 놀라 진달래의 표정을 살펴보니 말과 다르게 표정은 좋아 보였다. 나는 안심이 되어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볼게요.”
“그 얘긴 그만 해요. 이제 오늘의 마지막 장식은 숙제가 되겠어요. 제목은 ‘현실의 선과 악’이에요. 기한은 내년 봄 까지고요. 어제 오늘 선생님께 말씀드린 것은 주로 창조 때에 있었던 것을 말씀드렸고 그것을 성경에 잠깐 연결시켜 본 거예요. 숙제의 내용은 성경의 내용을 현실에 적용시켜 보는 거예요. 현실에서는 선(善)과 악(惡)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거예요. 결국 전체를 보았을 때 신(神)의 뜻이 현실에 잘 반영되고 있는지를 보자는 거예요. 만약에 창조 때와 지금의 현실, 이 둘이 따로따로이면 창조는 실패한 것이 되고 마는 거예요. 알았어요?”
“알긴 알았지만``````.”
“무슨 문제가 있어요?”
“아직 정리가 안 된 것이 두 가지 있어요.”
“말씀해 보세요.”
“하나는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에는 확실히 다른 점, 한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
“그게 뭔데요?”
“사랑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것이 좋아함에는 있었다는 거예요.”
“그게 뭔지 빨리 말씀해 보시라니까요.”
“눈물이에요. 사랑함에는 없었던 눈물이 좋아함에는 있었다는 거예요. 좋아해주면 좋아서 웃음이 나와야할텐데 왜 눈물이 날까요? 이상하잖아요?”
“알았어요. 답 드릴게요. 그 둘이 내용은 비슷하지만 차이가 있는 건 맞아요. 사랑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널리 통용되는 것이고, 반면에 좋아함은 나한테만 집중되는 거예요. 나에게 쏟아지는 그 응집된 힘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눈물샘을 꼭 찔러 자극시켰기 때문이에요. 그 눈물샘이 자극받는 조건은 딱 두 가지 경우뿐이에요. 한 번은 가장 좋아하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경우이고, 또 한 번은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았을 때입니다.”
“맞는 말이에요.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 때 완전히 눈물샘이 바닥난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아까 또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왜 눈물이 나오나 했더니 그렇게 된 것이군요. 이제 알았어요.”
“또 한 가지 문제는 뭐에요?”
“졸아한다는 말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갈 때나 저쪽에서 이쪽으로 올 때나 똑 같이 서로 좋아한다고 하는데, 사랑한다는 말은 왜 선행과 사랑으로 나눠지는지 궁금해요.”
“좋아한다는 것은 당사자들의 격이 비슷비슷한, 예를 들면 친구사이 같은 경우에 쓰이지만, 사랑은 양쪽이 차이가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면 창조 때는 신(神)과 인간의 차이였으니까요. 내용은 같은 것이지만 전달하는 과정에서 조물주는 선행(善行)이지만 인간으로서는 사랑이 되는 거예요. 선행 쪽이 격이 높다는 뜻이에요. 서로가 친구사이 같은 때는 선행이라 하지 않고 같이 사랑한다고 해도 문제가 안 될 것 같아요. 그럼 이제 문젯거리가 다 해결된 거지요?”
“아니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그럼 이번 질문이 마지막이에요. 알았지요? 더 이상 질문은 받지 않을 거예요.”
“나는 오래도록 질문하면서 이렇게 같이 있고 싶은데`````, 좀 서운하지만 알았어요. 기독교에 관한 설명에서 이상하게도 의심쩍은 의문점이 하나 남아있어요.”
“그게 뭔데요?”
“기독교가 선(善)인지 악(惡)인지를 알려면, 처음에는 존엄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보면 된다고 했고, 그 다음에는 성경에 따르는지를, 또 그 다음에는 교회 안에서 선행과 사랑이 일어나는지를 알아보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했어요. 맞지요?”
“네. 맞아요.”
“그 바로 앞에서는 성경이 똑똑한 사람들에 의해 신(神)의 의중을 밝혀낸 최고의 책이라고 했는데, 지금 성경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이 교회이니 교회는 선행과 사랑이 펼쳐지는데 필요한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데, 그런데 왜 기독교가 악(惡)이 돼야 하는지 정말 이상하네요. 교회가 성경에 있는 A, B, C 중에 B의 인문학내용을 다루어 왔다면 국가나 사회가 정신적으로 발전하는데 크게 기여했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성경이 널리 읽혀져야 할 책인데도 일반 사회에서는 흥미도 없고, 찾아보기도 힘들고 교회에서만 통하는 책인 것은 사실이에요. 정말 이제야 질문다운 질문을 하셨어요. 제가 이 때까지 이 질문이 언제쯤 나올까 하고 많이 답답해했었는데, 이제야 속이 후련하네요.“
“왜 답답해했어요? 이 질문이 그렇게 중요했던 건가요?”
“네, 중요한 질문이에요. 이 질문이 없었다면 오늘의 일은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중요한 것이면 미리 귀띔해 주던지 했어야지. 나는 그런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요.”
“그것을 알려서 미리 아시면 안 돼요. 스스로 깨달아서 알아야 돼요. 그래야 재미가 있는 거예요. 이 재미를 조금 격을 높이면 기쁨이 되고 좀 더 높이면 행복이 되는 거예요. 이 행복이 선행(善行)과 사랑의 보너스 에요. 교회가 왜 B의 내용을 내세우지 않고 A와 C를 다루었을까? 이제 기독교 얘기를 좀 더 계속할게요. 이제는 기독교를 악이라고 전재하고 얘기하겠어요. 만약에 기독교가 악이라면 교회 안에서 선행과 사랑이 제대로 이행이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인데,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래서 물어보는 거예요. 교인이라면 신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 일진데, 그것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도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종교인가요?”
“그러게요. 선행과 사랑이 왜 교회에서 이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겠어요? 답은 딱 한가지에요. 선행과 사랑이 필요 없었던 것이에요. 거기의 신(神)이 조물주 신(神)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교회의 신은 자연이 아닌 무엇을 가르치고 있어요?”
“인간들이 만든 교리에요.”
“왜 인간들이 자연의 이치에 따르지 않고 교리 같은 것을 만들었을까요?”
“근본적으로 목적이 달랐던 거예요. 자연이 선(善)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면 교리는 악(惡)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에요.“
“그렇다면 기독교가 자진해서 악(惡)이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해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는지요?”
“네. 그것이 바로 물질이나 권력을 탐하는 탐욕이라는 거예요.”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모두 그를 위한 내용들인가요?”
“아까 A, B, C로 나뉜 중에서 A와 C가 거기에 해당돼요.”
“이상하네요. 그러면 교회의 성도님들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요?”
“한 마디로 그것이 신앙의 종교라는 거예요. 사랑은 없고 오직 믿음뿐이라는 거예요.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 그렇게 해온 거예요. 자세한 건 다음에 기회가 오면 다시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그보다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성경이 교회가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A와 C만 있으면 될 텐데, 왜 B를 포함시켰을까 하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글쎄요. 조금 전에 자연과 교리가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들었는데, 왜 그것을 책 한권에 함께 섞어놓았을까요?”
“중요한 문제에요. 한번 맞춰보세요. 힌트를 드린다면 성경을 교회 측에서 만들었을까요?”
“그러면 성경을 교회에서 만들지 않았단 말인가요?”
“만약에 성경을 교회에서 만들지 않았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성경을 만들었을까요?”
“모르겠는데요. 어려운 질문이네요. 성경에 B의 내용이 있는 걸로 봐서는 교회에서 만들지는 않은 것 같고, 혹시 A, B, C의 내용을 책 한권에 다 싣고 싶었던 사람이 있었을까요?”
“맞아요. 있었어요. 그 사람은 교회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善)과 악(惡), 모두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특히 B의 내용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에, 그 시대에 꼭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고 또 교회도 살리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A, B, C의 순서로 얘기가 이어진 것 같아요. 이에 대한 자세한 것은 나중에 종교와 같이 얘기하겠어요.”
“그래도 당장 궁금한 것은 교회의 성도님들이 성경도 가끔씩 보았을 것이고,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선행과 사랑을 조금이라도 생각했을 것 같은데, 그냥 무조건 교리에만 따르지는 않았으리라 봐요. 교리에만 따른다면 모든 교인들의 사고와 행동이 통일이 돼야 할 텐데, 그 많은 교인들의 생각이 다 같을 수는 없잖아요. 또 교회 측도 B의 내용이 뻔히 보이는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
“그러나 만약에 더 강한 힘이 있어 모든 교인들의 사고와 행동을 강제로 억압해버린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어요.”
“교인들도 인간이고, 인간이라면 각자의 가치를 살리기 위해서도 사랑하고 싶었을 텐데, 그것을 강제로 막아버리다니 도대체 무슨 힘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교리에요. 교리를 간단히 얘기하면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교회의 신을 칭함)이 주신다는 것이고, 또 인간은 타락한 죄인이지만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이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에요.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니 선행과 사랑이 교회 내에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것이지요. 만약에 누군가가 굳이 하고 싶다고 나서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아예 금기시하고 있어요. 이러니 기독교는 자연과는 완전히 멀어진 인간들만의 도시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결과로 교회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교회에는 선행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에요. 다시 말씀드리면 선행과 사랑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교리가 분위기를 구속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분위기를 살려,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어요?”
“교리를 제거해야 되겠지요.”
“교리만 제거한다고 분위기가 조성 된다는 보장은 없어요. 또 일부 성도님들께는 종교가 필요하기에 없앨 수는 없고. 분위기만 개선하면 돼요. 그러려면 교리에 의한 구속은 약하게 하고 대신 그 자리에 뭐가 놓여야 될까요?”
“자유 말인가요?”
“예 맞아요. 성경에 B의 내용을 둔 것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교인들 중에도 선행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서요. 혹 자유란 단어의 의미를 아시는지요?”
“그거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내 마음대로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그냥 단순하게 자유라고 하면 의미는 그게 맞아요. 그렇게 되면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대게는 무엇에 대한 자유인지 자유 앞에 목적어를 붙여 범위를 정해요 예를 들면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 등이요. 그런데 여기서처럼 글이 선과 악 등 창조와 연관된 내용일 때는 목적어를 붙이지 않아도 있는 것으로 통해요. 그렇다면 이럴 때 자유 앞에 목적어는 무엇일까요?”
“글쎄요. 생각이 안 나는데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꼭 기억하셔야 돼요. 바로 ‘선행과 사랑’에요. 이렇게 되는 것은 원래 자유가 창조, 진리, 선과 악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원래 자유가 품고 있는 의미에요. 자유의 오리지날이예요.”
“선행과 사랑의 자유? 그렇다면 선행과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얘기군요.”
“맞아요.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 있어요. 선행과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풀이하면 자유는 ‘선행과 사랑의 뜻을 알고 그것을 제약받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 분위기 또는 권리를 말한다’가 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하면 앞의 자유는 선행과 사랑의 목적이 되어, 이런 국가에서는 선행과 사랑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국가라는 것이에요. 선행과 사랑의 결과에는 행복이 보너스가 되기 때문에 이런 나라는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국가라는 것이에요. ‘자유’라는 낱말은 단순히 구속에서 해방된 상태이기보다, 어떤 목적을 향한 그 다음의 행동이 무엇이냐가 중요한 거예요.”
“자유라는 단어가 굉장히 중요한가 봐요?”
“네, 중요한 단어에요. 선행과 사랑, 존엄 등 모든 아름다움이 이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 이것이 진리의 결과물이 되기 때문이에요. 성경을 만든 사람이 그 당시 로마를 통일한 황제였었는데, 그 황제가 정책을 펴는데 이 자유를 가장 중심에 두고 우선시 했어요. 이 자유의 의미를 로마의 철학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것인데, 로마가 통치하고 있던 유대지방의 나사렛이라는 한 시골 마을에서 살았던, 예수라는 사람에게서 찾게 되었던 거예요. 이 때는 예수가 죽고 약 300여년이 지났을 때이지만 예루살렘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예수를 따랐던 무리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대를 이어 그 때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새기고 가르치고 있었어요. 황제는 그것을 역사에 남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역사학자 등 측근의 사람들에게 지시하여 방법을 찾도록 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성경이라는 책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책이 성경이라 교회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었고, 타협 끝에 성경 내용에 황제는 예수의 가르침 즉 B를 포함시킬 수 있게 되었고, 교회는 예수를 신격(神格)화 해서 만들어진 예수 신(神), 예수그리스도로 C에 포함시키기로 했어요. 성경의 내용이 실질적으로 ‘예수’와 ‘예수 그리스도’, 2축으로 나눠지게 되었어요. 이것이 2축으로 나눠진 역사의 책, 바이블이 된 거예요. 마치 두 바퀴로 굴러가는 바이스클(자전거)처럼`````` 이 2축은 내용적으로 ‘자유’와 ‘교리’의 의미를 담고 있어요. 황제는 예수를 한 인간으로 다루어 그의 가르침, ‘자유’의 의미를 성경에 남겼고, 그것이 성경에서 B가 되었고 예수는 성인(聖人)이 되었던 것이에요.”
"황제가 교인이었어요?"
“아니오. 철학을 좋아했나 봐요. 자유'와 관련된 문장을 하나 더 예로 들어 볼게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는 말이 있지요?”
“네, 들어 본 것 같아요.”
“여기에서 자유도 선행과 사랑이 목적어가 된 자유에요. 이 말의 뜻은 선행과 사랑의 자유가 없으면 행복이 없는 삶이될 것이고, 그럴 바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유가 없으면 인간다운 삶을 가질 수가 없다는 뜻으로 자유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아하~ 이제 알았어요. 선행과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취하는 행동이 어떠냐가 더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의문이 하나 풀렸어요.”
“뭘 아셨다는 거예요? 그게 뭔데요? 저는 선생님이 뭔가 새로운 것을 아셨다고 할 때가 제일 좋아요.”
“맞아요. 나도 진달래님이 그로 인해서 좋아할 때가 행복해 보였고, 그럴 때는 나도 같이 행복해 지더라고요. 이상하죠? 행복은 둘이 마주보고 있을 때 오나 봐요.”
진달래가 뭔가를 말할 듯 말듯하면서도 말은 않고 빙긋이 웃고만 있다. 잠시 뒤 입을 열었다.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사랑은 행복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에요.”
“우와~ 공장이라구요? 행복공장? 우리는 그 행복공장의 일꾼들? 나는 앞으로 새로운 것을 많이 만들어 낼 거예요. 그리고 앞으로는 질문은 하지 않을 거예요.”
”왜요?“
“질문은 행복이 되지 못하고 진달래님이 답하는데 애만 먹일 테니까요.”
“아니에요. 질문도 답을 통해서 금방 새로운 것이 돼요. 똑 같은 거예요.”
“그런가요? 나는 질문하는 것이 귀찮게 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어요.”
“절대로 그런 생각 하지 마시고 질문도 많이 하세요. 그럼 아까 새로 알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말씀해 보세요.”
“그 전에 한 가지만 먼저 얘기하고 할게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양심의 자유’와 ‘선행과 사랑의 자유’가 이상하게 자꾸 내용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이 둘에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진달래가 또 아까처럼 답은 않고 빙긋이 웃고만 있더니 잠시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나중에 끝날 무렵에 선생님이 어제오늘 있었던 얘기를 정리를 해서 말씀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렇게 해주실 수 있겠죠?”
“그럼요 하고말고요.”
“고맙습니다. 그럼 답할게요. 양심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한 번 말씀드린 것 같아요. 그 둘의 내용은 똑 같아요. 한 가지 다른 점은 양심의 자유는 창조 때에 신(神)이 만드신 것이고, 선행과 사랑은 지금 시대에서 인간이 그것을 더 적극적인 내용으로 표현했을 뿐이에요. 즉 희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에요. 그러니 둘 다 소중한 것이고, 인간이 이들을 통해서 인간답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알아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고요?”
“네. 맞아요.”
“지금 말하려는 것도 이것과 비슷한 내용이에요. 선행과 사랑의 의미를 알고 난 뒤의 적극적인 행동이 정말 중요하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인데요?”
“악(惡)을 밝혀야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밝혀지는데요?”
“정상적으로 선행과 사랑을 알고 자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당연할 진데, 반대로 가는 것은 고의적이라는 것이에요. 이 고의적인 행동이 악(惡)이 되는 결정적인 것이라고 봐요. 즉 알고 있으면서 고의적으로 조물주의 뜻, ‘양심’이나 선행과 사랑을 배척했을 때 이것이 악이 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있는데요. 만약에 사랑할 기회가 없었거나 사랑을 하지 못해서 선행과 사랑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떻게 돼요?”
“선행도 할 수 없고 악행도 할 수 없게 되겠지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신이 ‘조물주의 사랑’으로 양심을 인간들에게 심어주셨던 것 같아요. 선행과 사랑을 아직도 잘 모르고 있는 지금의 사람이나, 전혀 몰랐던 옛날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희미하지만 양심에 의존할 수 있도록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해요. 일부 중요한 임무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지금 시대에도 이것이 신(神)의 뜻으로 통하고 있고요.”
“선생님은 진짜 멋지세요. 맞아요. 지금도 ‘양심’과 ‘양심의 자유’는 필요한 것이고 요긴하게 쓰이고 있어요. 정말 멋진 생각을 하신 거예요. 이래서 제가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저는 지금 행복해요.”
“나도 행복해요. 국민들이 모두 행복해지려면 무엇보다도 선행과 사랑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되겠어요.”
“맞아요. 돈 벌어 부자가 되는 교육, 남을 이겨 내가 1등이 되는 교육, 높은 자리에 오르는 교육 등 다 필요하겠지만 선행과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 보다도 최우선이 돼야 해요. 동식물은 선행과 사랑을 알 길이 없으니 인간다울 수는 없는 것이고, 그러나 그들도 그들만의 가치와 그들만의 양심을 가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살아가고 있어요. 만약에 인간이 양심이 없거나 선행과 사랑을 모르고 살 때는 종의 삶 또는 짐승의 삶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제 얘기는 다 끝난 것 맞지요? 질문이 없는 거죠?”
“있지만 그만 하겠어요.”
“아니요. 하세요. 겉으로는 태연한척 했지만 제 마음도 잠시나마 떨어진다는 게 선생님 못잖게 서운한 거예요. 이런 제 마음을 선생님은 모르실거예요. 그렇죠?”
“진달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인데 왜 그걸 모르겠어요.”
“그럼 됐어요. 이제 질문해 보세요.”
“내일 또 와도 되죠?”
“안돼요. 이틀만이라고 약속했잖아요. 내일은 또 다른 친구들을 만나야 돼요. 좀 바빠요.”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도 보이질 않는데요?”
“오고 싶어 근처까지 왔다가도, 우리를 위해서 일부러 피해준 거예요.”
“그랬군요. 고마운 친구들이네요. 내가 좀 욕심을 부렸나 봐요. 알았어요.”
“그러면 이제 어제오늘 얘기를 종합해서 간단하게 마무리해 주세요.”
“무슨 시험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조금 떨리는데요. 생각나는 대로 얘기할게요. 전체 얘기 중에서 충격일 정도로 크게 감동받은 때가 딱 한 번 있었어요.”
“어떤 대목에서 그랬어요?”
“행복공장을 말했을 때에요. 사랑이 제공해주는 아름다움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여, 행복을 만들어내는 행복공장, 정말 최고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공장이라고 생각했어요. 꼭이 선행과 사랑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그런 마음만이라도 가지고 있으면 평소의 일상생활 속에서도 소소한 행복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똑 같은 일을 해도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여럿을 위한 행복공장이 되고자 할 때도 있다는 것이에요. 무슨 일을 하던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하면 모두가 밝은 이웃이 될 것 같아요. 어제 오늘 얘기의 키포인트는 ‘조물주의 사랑’이고 그것이 인간들에게는 소중한 신(神)이 주신 선물, 아름다운 마음과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됐어요?”
진달래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뭐가 잘못 됐어요?“
“너무 말씀을 잘해 주셔서 기가 막혀서 그래요. 내년 봄까지 해야 할 숙제도 이렇게만 해주세요. 이제 헤어져야할 시간인데, 어쩌죠?”
“내가 먼저 일어날 수밖에요. 내년 봄이 언제 또 오려는지````` ”
“우리에겐 그 봄이 수확의 계절이에요. 그 때까지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는 사이 금방 올 거예요.”
우리의 인사는 언제나 그렇듯, 말은 않고, 그저 잠시 동안 빙긋이 웃으며 마주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내가 일어나 무거운 발걸음으로 터덜터덜 산을 내려오는데 나를 붙드는 반가운 소리가 등 뒤 멀리서 울려왔다.
“선생님~~~”
메아리 같은 소리에 내가 뒤돌아보자
“내년 봄에 잊으시면 안돼요~~~”
“?”
“카푸치노 말이에요~~~”
나는 입이 떨어지질 않아 말로는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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