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은 아름다움을 싣고 살금살금,
졸졸졸 이 골짝 저 골짝,
이 동네 저 동네를 돌면서,
찌익 쿡 찌익 쿡, 물레방아도 돌려주고,
빨래터에서는 재잘 재잘, 아낙네들의 수다에 툭탁툭탁 장단도 맞추면서,
흘러 흘러가면서, 아름다움을 나눠주는 배달부이지요.
그러면서 시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고,
빈 가방에는 더러움 주워 담으면서,
드디어는 바다에 도착하여,
주워 담은 것들은 바다바닥에 짓눌러 기를 못 쓰게 한다.
임무를 마친 사랑은 바닷물 위쪽에서 조금씩 조금씩 공중으로 날아올라,
때가 되면 태풍이라는 비행기를 타고 다시 고향으로, 산으로 돌아가지요.
“강줄기가 처음에는 산골짝 조그마한 웅덩이 고인 물에서 시작했다면, 아름다움과 사랑의 원천은 어디일까요? 어디서 시작하는 걸까요?”
“내가 살펴본 바로는 자연에서부터가 아닐까 생각해요. 예를 들면 진달래님이 아름답잖아요.”
“아니에요. 저는 단지 계주경기에서 바통을 받아서 다시 넘겨주는 역할 정도에요. 자세한 건 예술인들의 작품 활동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제 예술인들이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내려면 누구보보다 자연에 대해서 잘 알아야 된다고 얘기했잖아요.”
“네, 했어요. 그렇지만 그 말에서 살펴본다는 것은 자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연을 통해서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을 알아본다는 뜻, 통찰이에요.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자연도 저나 예술인들과 마찬가지로 중간역할 즉 아름다움을 받아서 또 그것을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랑과 선행의 역할을 하는 겁니다. 단지 한 가지 다른 점은 자연은 첫 번째 중재자이고, 예술인들은 두 번째 중재자라는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재자 이전에 아름다움의 탄생지가, 본적이 어디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려면 먼저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지부터 확실히 알아야겠어요.”
“잘 생각했어요. 어제 제가 아름다움이 뭐라고 했어요?”
“사물이 고유적으로 가지고 있는 1,가치와 2,존엄 그리고 3,품성이라고 한 것 같은데요.”
“네, 맞아요. 거기서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과 이름을 말하는 거예요. 사람의 경우 얼굴, 팔 다리 등은 누구나 거의 비슷하나 그 사람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마음은 다 다르다는 것이에요. 그 마음이 평소에 그 사람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 마음과 이름이 그 사람의 가치에요. 이에 비해서 존엄은 권위 즉 누구나 가지고 있는 신이 주신, 그만이 가지고 있는 존재의 이유예요. 그가 이 세상에서는 필요한 역할이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품성은 이런 가치와 존엄을 질서를 통해서 지키려고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유하자면 지금의 헌법과 같은 성질이에요. 이 사회가 아름다워지려면 모두가 국가의 질서인 헌법을 잘 지켜야겠지요. 정리하면 아름다움은 그만의 가치와 존엄을 지니고 있고, 질서를 통해서 그것을 지키고 나타내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것은 이런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고, 선행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 진 나의 아름다움을 다시 남에게 가르쳐 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런 과정에서 서로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거예요. 자연은 언제나 선행을 할 준비가 이미 되어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에 따라서 사랑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쉽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먼저 경험한 사람을 통하는 것이 유리해요. 예술가, 철학자, 인문학자등 사물에 통달한 사람들이 그 사람들이에요. 어쩌면 사랑은 직접 찾던지 아니면 이 사람들을 통하여 원래의 나를, 또는 조물주의 마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어요. 예술가가 아름다운 글을 쓰려면 아름다움의 구성요소인 이런 것들을 잘 다뤄야 해요. 식물도 자세히 보면 멋지게 아름다움을 잘 표현해 내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이 아름다움을 표현해낼 수 없다면 말이 안 되지요. 얘기가 길어지니 재미가 없지요? 이럴 때 카페 라떼 한 잔 먹었으면 좋겠는데`````` 아름다움 또는 사랑을 얘기할 때는 언제든지 라떼가 딱 제격인데`````.”
앗차, 내가 또 실수를 했구나 생각했다. 이런 것을 미리미리 생각하고 오늘도 준비했어야 되는데, 또 그러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고 준비해 놓고는 깜빡 잊고 가져오질 못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대신 내년에는 더 맛있는 차를 준비해 올게요.”
엉겁결에 둘려댔다.
“차 이름이 뭔데요?”
“카푸치노 라는 차요. 그전에 먹어봤는데, 향긋하고 더 맛이 있더라고요.”
“알았어요, 저도 먹어 본 적이 있어요. 카푸치노는 제자리에 가서 먹어야 바리스타의 실력도 알 수 있고 맛도 알 수 있어요. 그 사람의 마음가짐도 중요하다는 뜻이에요. 던져주는 말 한마디에 맛과 기분이 확 달라진다는 뜻이에요. 꼭 한 번 맛을 보게 해 주세요. 저는 아이스 카푸치노를 좋아해요. 얘기를 계속할게요. 사랑과 선행(善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제일 중심적인 내용은 ‘존엄’이에요. 존엄이 절대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에요. 그 존엄을 형태만 다양하게 했다 뿐이지, 성질이 같은 것을 신이 각각의 피조물에 질서 있게 심어주셨던 거예요. 크고 작은 차이만 있을 뿐 형상은 신(神)과 피조물은 같다는 뜻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신(神)과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 피조물은 작은 절대자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러니 누구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되지요. 인류사는 어쩌면 이 존엄이 인간들에 의해서 어떻게 대우받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 때까지는 자연과 인간이 같이 신(神)의 뜻에 따라 존엄이 잘 유지되어 진행되어 왔어요. 하지만 이제부터 인간들의 세계는 상황이 다르게 돼요. 그 이유는 신(神)이 보시기에 존엄만으로는 인간의 삶이 생기가 없고, 행복하게 보이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생각 끝에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이성(理性)을 주셨어요. 인간이라도 이 이성을 크게 사용하지 않으면 자연에 가깝게 원래의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요.
인간에게 이성이 작용된다는 것은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다는 의미고, 그 결과 어떤 경우에는 신(神)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존엄을 해칠 수도, 아름다움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인간에게도 이미 심어진 존엄과 질서가 중요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럼에도 이들이 신의 뜻을 거슬렀다면, 무엇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요? 혹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한 번 말씀해 보세요."
“글쎄요. 내 생각에는 뭔가 자신에게 더 큰 득이 있었기 때문에 거스르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만`````` ”
“맞아요. 그러면 이제부터 신의 뜻을 거스르는 과정을 살펴볼게요. 거스르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 선행(善行)의 반대, 악행(惡行)이라고 하겠어요. 결국 인간에게 이성으로 말미암아 악행이 존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선택의 여지가 주어졌다는 거예요.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악(惡)이 생기기 전까지는 없었던 것이 이제는 둘 중에 어느 것이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그들에게 주어지게 되었고 또 하나는 희미하나마 이미 그들의 마음에 조물주의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에 선택에 있어 선(善)이 유리했다는 것이에요.”
“근원적으로 봤을 때 선(善)이 아름다움에서 시작했다면, 악(惡)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인지도 더 궁금해지는데요.”
“그럴 거예요. 아름다움과 악(惡)은 창조의 두 축이 되기 때문에 악을 모르면 안 되지요. 결국 조물주(神)의 창조는 2단계로 나뉘어 진행됐어요. 아름다움을 위주로 한 창조가 1차 창조였다면, 2차 창조는 악(惡)을 위한 창조이고 이것은 이 세상을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어요. 아름다움의 창조가 조물주, 자신에게서 시작되었다면 악은 2차 창조 때 두 사람,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 되었어요. 그 진행과정은 다음과 같아요.
1, 아름다움의 창조(1차 창조)
2,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에 달려있는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신의 당부
3, 볼수록 따먹고 싶은 욕망이 생김
4, 선택의 기로에 놓임, 이성(理性)에 의한 판단이 필요한 시점
5, 열매를 따먹도록 부추기는 뱀(악의 아비)
6, 악(惡)을 선택
7, 선택에 따른 대가
2~7의 과정이 악의 시작이었어요.
악(惡)을 선택하게 된 결정적 요인은 5의 뱀의 유혹이었어요. 원래 아담과 하와도 1차 창조 때에 다른 인간들처럼 똑 같이 창조되었던 고로 아름다움과 이성을 간직하고 있었고 자유도 있었어요. 그런 상태에서 신의 의도적인 2차 창조에 의해 위의 과정을 거쳐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그 전에는 가져보지 못했던 선(善)과 악(惡),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던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열매를 따먹으면 신(神)과 같이 될 수도 있다는 뱀(악의 아비)의 꾐에 빠져 결국 열매를 따먹게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결국 따먹지 말라는 신의 당부를 거스르는 악을 범하게 되었던 거지요. 이 때의 잘못을 죄(罪)라고도 볼 수 있으나 창조 때에는 죄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창조 때의 잘못은 전부 악(惡)이 돼요.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리겠어요. 수억 년 전, 태초에 있었던 이런 일들을 현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추측할 수가 있었을까요? 무엇이든지 생각나는 것 있으면 말씀해 보세요?"
“글쎄요, 가끔씩 이 숲에서 신의 의중을 혹시나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어요. 이런 생각도 그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네, 있어요. 부분적이긴 하지만요. 세상 전체를 알려면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북적대는 도시까지도 다 알아야 돼요. 특히 악에 대한 내용일 때는````` ”
“악이 인간과 연관이 있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악이 아담과 하와라는 인간에서 시작하여 많은 인간들에 이어졌다는 거예요. 이런 창조의 과정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근거가 자연이나 도시에 그 흔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신(新)이 자연을 만들 때 인간들이 창조의 가치도 살리고 아름다움도 알 수 있도록 신경 쓰면서 만들어 놓았던 것이지요. 이래서 인간은 자연을 통해서 계속 신(神)과 관계를 유지하여 가는 것이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신의 의지가 세상사에 계속 작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흔적들을 찾아 그것을 근거로 창조의 과정을 추측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견하고, 그것을 분석하여 고대에 있었던 일을 재현해 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과연 제대로 생각해낼 수가 있을 까요?”
“어려운 일인 것만은 맞아요. 그러나 이 일에 최고의 현자(賢者)가 관여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에요. 특히 창조의 목적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 창조 때에 신(神)이 신경을 많이 써 놓았어요.”
”그렇다면 그 때나 지금이나 시대상이 같다는 말이 아닙니까?”
“언제나 내용이 같다는 것입니다. 즉 신(神)에게 각본이 있었고, 창조는 각본에 따라 그 범주 안에서 이루어졌고 그 안에서 진행해 가는 거예요.”
“혹시 악(惡)의 창조가 성경에 있는 내용이 아닙니까?”
“맞아요. 성경 책 내용 중에 있어요. 악(惡)이 창조되는 과정이 그 책속에 있는 것은, 그 시대 즉 2000년 전, 성경이 만들어질 무렵에 어떤 똑똑한 사람들이 있어서, 신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 내용으로 성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라는 책은 보통 책이 아닌데요?”
“맞아요. 특히 한사람이 아니고,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을 가진, 똑똑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여 만들었고, 한 시대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만들어진 내용들이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어느 시대에나 통하고 또 전 세계인들 모두에 해당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그만큼 스케일이 넓다는 뜻이에요. 너무 완벽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시 이런 종류의 책은 나올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정말 굉장한 책이네요.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선(善)과 악(惡)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어요?”
“간단히 말하자면 선 또는 선행은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고 지키는 것이라고 쓰고 있어요. 풀어 쓰면 모든 사물(인간도 포함)이 가지고 있는 각각의 가치와 존엄을 살려준다는 것이고 질서를 통해서 지켜준다는 것이에요. 인간이 이 길을 선택했을 때 내게 오는 결과는 행복이라는 것이고요. 행복이 내 노력과 선택에 의해서 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반면에 악은 질서를 깨면서 남의 가치와 존엄을 멋대로 빼앗는 거예요. 존엄이 행복의 필수 조건인데, 존엄을 빼앗긴 자가 제대로 된 행복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존엄을 빼앗은 자신도 정신적 고통과 불안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의 뜻을 거스른데 대한 대가라는 거예요. 요약하면 성경대로 알고 따르면 선이고, 반대로 가르치고 행하면 악이 돼요. 만약에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를 알아보려 한다면,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을까요?”
“존엄을 살려주고 있는지 아니면 빼앗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겠네요. 또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따르면 선이고, 반대면 악이 되겠네요.”
“맞아요. 또 한 가지 방법은 교회 안에서 선행과 사랑이 존재하는가를 알아본다면 그것이 더 구체적인 것이 되겠지요.”
“그러네요. 안목을 넓게 볼 필요가 있군요. 그런데 조금 전에 기독교 자체가 선인지 악인지를 알아본다고 했는데, 그럼 혹시 기독교가 악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야 아까 얘기한 3가지 방법 중에 하나를 적용시켜보면 금방 알 수 있겠지요.”
“정말 너무 궁금해요. 기독교가 역사도 길고, 세계적 종교인데, 이런 기독교를 어떻게 악(惡)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네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까지의 세계사는 악(惡) 가운데서 살아온 것이 되는데, 기독교가 악이라고 볼만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한 번 확인해 봤으면 좋겠는데요.”
“그것이 그렇게 궁금하세요? 그러면 먼저 성경을 기준으로 한 번 살펴보자고요.
먼저 질문을 하나 해볼게요. 성경이 가장 많이 읽히고 쓰이는 곳이 어디에요?"
“그야 단연 교회지요. 기독교이지요.”
“맞아요. 그러면 일반 사회에서는 성경이 어떤 존재일까요?”
“그야 말할 필요도 없이 별로지요.”
“왜 최고인 책인 성경이 그렇게 되었을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거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성경이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까지 일반인들에게 성경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는 거예요. 읽기가 어렵게 된 것은 성경의 시작부분이 아주 재미없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거예요.”
“어떻게 되어 있기에?”
“혹시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으세요?”
“한 번 읽어보려 했는데 무슨 의민지 전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포기한 적이 있어요.”
“당연한 거예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책이 성경이었으니까요.”
“아니 그럼 성경이 잘못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아니에요. 잘못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내용이 재미가 없게끔 만들어졌다는 거예요.”
“아니 최고의 책인 성경이 재미가 없다니 그게 무슨 얘긴가요?”
“처음 시작부분이 재미없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어떤 내용인데요?”
“성경이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의 50% 정도가 구약이고 이것이 악(惡)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재미도 없고 지루해서 모두가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더군다나 이 부분은 유대교의 경전이라 유대교 교인들에만 해당돼요. 나머지 중에 앞의 25%정도가 예수의 가르침으로서 선(善)의 내용이고, 이것을 뺀 마지막 25%는 기독교 경전인데, 특징이 구약이 더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어요. 문제는 앞의 50%가 진짜 재미없다는데 있어요. 웬만한 독자는 이 부분에서 싫증을 느끼기 마련이에요. 그렇다 해도 이 부분이 중요한 것은 악(惡)을 모르고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에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악은 빼고 25%의 선의 부분만 발췌해서 읽으면 안 될까요?”
“그렇게 하면 악을 알 수가 없잖아요. 악이 없으면 선이 필요 없듯이 악을 모르면 선도 제대로 알 수 없고 소용도 없게 돼요. 선의 가치가 악에 의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싫어도 알아야 되는 것이 악이에요.”
“알 것 같아요. 밝음을 제대로 알자면 어둠을 이해해야지만 알 수 있다는 말이군요.”
“네, 맞아요. 캄캄하고 답답한 어두움을 지나가자니 얼마나 지루하겠어요. 정말 선생님은 대할수록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마음 바탕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이런 창조에 관한 얘기가 잘 받아들여진다는 뜻이에요. 이제까지 선생님은 세상을 살아오신 것이 아니라 이제 막 울음을 터뜨리고 태어난 아기 같아요. 때가 묻지 않은 순진하고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 말이에요. 그리고 또 호기심도 많이 가지고 계시구요.”
“뭐가 뭔지 잘 못 알아듣겠어요. 칭찬하는 말인지 아니면 아이들처럼 철이 없다는 말인지 분간을 못하겠어요.”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거듭 태어나야지만 내용을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데, 선생님은 그런 과정이 필요 없다는 뜻이에요. 선생님은 태고 적에 조물주가 주신 양심을 순수함 그대로 가지고 계신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 자연적으로 자연과 궁합이 잘 맞고 친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저를 아시게 된 것도 그런 마음씨를 가지셨기 때문이에요. 선생님 정말 고맙습니다.”
“무엇을 고맙다고 하는 건지````"
“선생님이 그 순수한 마음씨를 가지고계셨기에 저를 만나주실 수 있게 되었던 것이고, 또 이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었던 거예요. 이런 일은 쉽지 않은 일인데 선생님 덕분에 저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몰라요.”
“내 생각에는 내가 진달래님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풀고 있는 진달래님이 내가 사랑할 있게 해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맞아요. 사랑은 상대와 같이 그리고 주위까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원천이에요."
---- 며칠 뒤에 (하)편 계속---
daum에서 온 산에 진달래가 뒤덮인 동영상 ‘조영남 바위고개’를 들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