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들에 대한 인간의 선행
(3) 짐승들에 대한 인간의 선행
짐승의 삶의 질은 인간에 의해 좌우된다.
닭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면 지금 우리나라의 사육형태가 미국식의 대량 사육방식으로 변해가고 있지만, 2십여 년 전만해도 닭은 농가에서 몇 마리 정도 기르는 형태였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그 당시 한 농가에서는 소 한 마리, 닭 10마리, 개 한 마리, 그리고 돼지 2~3마리 정도 길렀던 것이다.
이렇게 집에서 기르는 짐승을 특별히 가축이라 하였고, 이렇게 기르는 데는 몇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첫째는 사료를 따로 구입하지 않아도, 농사 또는 생활에서 나오는 부산물로 키울 수 있어 사료 값이 절약이 되었다. 둘째는 식구들 중에 누구든지 여유가 있는 사람이 돌아가면서 돌볼 수 있어 관리가 쉽다는 것이다. 셋째는 분뇨처리가 용이하다는 것이다. 조금만 수고하면 양질의 퇴비를 만드는데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가축마리수가 많지 않아 한 마리 한 마리에 두루두루 관심을 줄 수 있는 능력범위 안에 있어 각각에 맞는 정을 줄 수 있어 사람과 짐승이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점들로 인해서 가축과 인간 사이에 유대감이 생겨나 서로에 행복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수익 면에서는 그렇게 만족할 수는 없다지만, ①가축에게 짐승다운 삶의 가치를 줄 수 있게 되고 인간에게도 흐뭇한 마음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①에 비해 닭의 경우, ② 자유를 주지 않고 가두어 놓고 오직 달걀생산용이나 육류용을 목적으로 대량사육하게 되면 이는 짐승의 생명(생기있는 삶)을 죽이는 것이 되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되며 짐승과 사람의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②의 내용에서 대량사육은 몇몇 사람이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생명을 무자비하게 이용한 것이 된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 양심 없는 사람들에서 행해진다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짐승에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인간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가축의 삶의 질이 파괴되면 인간의 삶의 질도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도 양심 없는 사람에 의해 게이지 속의 닭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닭이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못 깨우게 하고, 부화장에서만 깨운다면 인간도 마찬가지가 된다. 자식을 낳으려 하지 않고 부화장 같은데서, 아기를 대량 생산하게 될 것이고 이는 인간 본성의 파괴이고 모두의 생명이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자연을 아름답게 가꾸고 유지해가는 주체는 인간이다. 조물주는 인간이 잘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자연에 심어 놓으셨던 것이다. 자연을 안다는 것이 이래서 필요한 것이다. 자연을 몰라 행복이 필요 없을 때 더 이상 자연은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어린 아이시절 소 등에 올라타고 들판을 돌아다니며 놀던 아이가, 나중에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그 소를 잊을 수 있을까?
장에 갔다 늦게 집에 가는 도중, 할아버지는 주막에 들러 술을 드시고 술에 취하여 지개를 등받이로 달구지에 누워 잠들면 그 때부터 소는 스스로 알아서 집까지 가야한다.
작은 고개를 넘어 가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소가 깜짝 놀라 달구지가 주춤하자 잠을 깬 할아버지가 일어나 보니 큰 호랑이가 가로막고 있었다. 술이 확 깬 할아버지가 잽싸게 소의 고삐를 풀어주자 호랑이와 소의 한 판 사투가 벌어졌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중에 할아버지가
“누렁이 이겨라! 누렁아 힘내라!”
할아버지가 응원을 하니 소가 힘이 났는지 호랑이가 높이 뛰어 오르자 뿔로 잽싸게 호랑이의 허벅지를 치받아버린다. 호랑이는 쩔룩거리며 달아났다. 이 이야기는 어릴 적 할머니가 들려주신 얘기다. 할머님의 이야기는 어떻게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저녁만 먹으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나였지만 그런 날은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럴 땐 언제나 내 잠을 먼저 걱정해주시는 할머니셨다.
할머님의 고향이 팔공산 동화사 밑 지금은 행정구역이 대구지만, 옛날에는 경북 달성군 공산면 ‘백안(면)’이라는 골짜기에 있는 작은 동내였지만 동물도 많았고 이야기도 많았다. 늑대와 호랑이가 가끔 나타나는 곳이라 해가 진 뒤에는 나들이 갈 때 꼭 황소를 데리고 다녀야 안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따로 배운 건 없어 많이 서툴지만 이 정도만큼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 시절 할머니의 얘기가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금의 내 마음이 그 때 만들어진 것 같다.
오래 전에 ‘원앙 소리’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무척이나 소를 아끼신다는 내용이었다. 논과 밭에서 언제나 함께 일하며 아끼던 소가 19살, 늙은 소가 되어 바로 죽음직전에 다다라, 할아버지는 일어서지도 못하는 소의 목덜미를 긁어주시면서
“누렁아! 너는 한 시절 나의 인생에 좋은 동반자 이었어, 너로 인해 농사도 잘 지을 수 있었고, 같이 일할 때는 늘 재미있었어. 너로 인해 내 마음이 편안하게 살 수 있었으니 너는 나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야. 이제 헤어져야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쓰리구나. 정말 섭섭하다 누렁아!”
할아버지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러자 소가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아들었는지 마지막 남은 힘으로 그 큰 눈알을 크게 한 번 껌벅였다. 그 동작이 마치 옛날에 여럿이 기념사진 찍을 때 사진틀 렌즈에 착각하고 열렸다 닫히는 셔터 같았다. 그 셔터가
“정(情)으로 늘 보살펴주셔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삶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하고 새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소의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이 얘기가 영화가 되어 나왔을 때 많은 관객들이 뜨겁게 호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까지 우리 민족의 본성이 자연을 버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 셈이다.
생전에 나도 소가 끌어주는 쟁기로 농사를 지어봤으면 하는데, 이루어질지 모르겠다. 내 추측에는 옛날에 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가난 중에서도 고생은 느끼지 못하고, 마음은 언제나 행복하게 살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렇게 짐승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 땜에 저토록 짐승을 아끼는 것일까?
순전히 소를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처럼 마구 부리거나 또는 소를 가두고 살만 찌개 하여 고기용으로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소가 연대하여 함께 살아가는, 서로가 필요로 하는 협력의 관계로 살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소는 짐승답게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인간을 위해 묵묵히 하고 싶었던 것이고, 사람은 소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소에게 자유스런 마음을 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마음이 일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사람의 가슴 깊숙한데서 우러난 것이다. 사람에게 양심이 있었던 것이고, 그 마음을 소의 마음속에도 새겨 숨겨져 있었던 조물주의 마음(소의 양심 또는 소의 아름다움)이 이끌러낸 것이다.
그래서 소에게도 양심대로(아름답게) 살게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은 지식으로 배워서 된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마음속에 지니고 살아온 인간의 본성이었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사람에게는 본성이 계속 살아 이어져 가는 것이다.
사람에게 이 양심은 어떻게 작용하는가?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똑같이 양심을 가지고 있어 어느 짐승이든지 사람이 쉽게 가까이 할 수 있다.
③짐승의 최고의 삶은 짐승답게 양심대로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려면 주인을 잘 만나야 한다. 바로 양심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짐승에게 짐승답게 더 아름답게 살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인간의 선행인 것이다. 인간의 양심이 짐승의 내면에 숨겨져 있는 조물주의 마음을 아름답게 본 것이다. 이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인간의 마음이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어내는 작은 창조이고 그 결과는 행복이다.